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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식 때 3년 개근상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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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OSIT 작성일22-09-17 12:03 조회1,39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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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때 가을소풍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지각 결석이 전혀 없었다. 그날 아침에 일어나서 소풍 집합 장소로 가려고 하는데, 모친이 붙잡는다. 가지 말라고 하신다. 꿈자리가 아주 사나웠다고...

 

공군에서는 비행사가 그런 경우 그날 업무를 면제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 모친의 꿈은 아주 적중도가 높았다. 그래서 알겠다고 하고, 내 부친이 소풍 집합 장소로 직접 가서 담임교사에게 통보했다. 내가 몸이 불편하여 하루 쉬게 하겠다고....

 

그 당시 내 부친의 피지컬은 압도적이었다. 공무원으로 재직했을 때 키가 가장 컸다. 그 당시 분으로 신장이 184cm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큰 키에 인상도 아주 엄하게 보였다. 그 당시 내 부친이 노려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속칭 쫄았다”.

 

그래서 그런지 저녁에 집에 오셨을 때 단임 반응을 물어 보았다. 당연히...

 

그 다음날 학교로 갔다.

 

아침 조회(?) 시간 때, 몇 명 이름을 부른다. 소풍에 참석하지 않은 아이들 이름이었다. 나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담임 교사는 경북대 사대 국어교육과 출신이었다.

 

그 당시 교실 뒤에 청소도구가 있었고, 밀대도 몇 개 있었다. 밀대 자루를 2개 가지고 오라고 아이들에게 시키더니 엎드리고 한다.

 

그러더니... 나는 5, 다른 아이들은 10... 나는 내 부친이 대신 가서 통보했으니...

 

그는 소아마비 학생도 참석했는데... 너희들은 머냐?”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내 사정을 다 담임에게 이야기 할 수도 없고, 그런데 만약에 내가 그날 소풍에 가서 사고를 당했다면, 그가 내 일생을 책임 져 줄까???

 

또 맞은 아이들 중에는...

 

경제적 사정이 정말 어려웠던 아이가 있었다.

 

그 당시, 1학생인 나는 그 아이 심정과 처지를 알았다.

 

점심때 도시락(= 밴또)을 먹지 않고 교실을 나가면, 나는 그 아이를 매점에 데리고 가서 빵과 우유를 여러 번 사주었다. 그런 날은 그가 도시락을 들고 오지 않았다는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때, 그는 소풍 때, 소풍 도시락과 빵이나 과자, 음료수를 사올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소풍에 빠진 것이었다.

 

그 아이는 엉덩이 10대를 맞고, 엉덩이와 그 아래 부위에 피 멍이 들었다.

 

그 당시는 1970년대이고, 우리는 그래도 한 반에 70명 이상이 되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입시로 들어온 세대였다. 중학교 한 반에,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학생은 그래도 “20 ~ (최대한)25”등수에 들어야 했다. 고등학교 재수도 흔히 있었던 세대였다.

 

그 당시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반에 적어도 대략 76명 이상이었다.

 

맡은 학생이 대략 76명 이상이라도 교사가 그 학생들의 신상을 제대로 모른다???

 

그래도 그 당시 담임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 국어를 재미없게 가르쳤지만 그래도 열심히 노력하려고 한 사람이다. 또 눈이 빨개서 촌지 챙기려고 하지 않았고...

 

물론 비교적 젊은 그도 거지집단에 속했다. 소풍가면 자기가 먹을 도시락 자기가 준비하면 되는데, 우글우글 모여 반장이나 부반장 아이 엄마가 도시락과 기타 물건을 준비하여 주기를 기다리는/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거지들...

 

물론 고등학교이다. 아이들 눈도 의식해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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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MOSIT님의 댓글

MOSIT 작성일

내가 보는 시각이 과연 전부이고, 모두가 올바른 것일까? 

그 교사는 신체가 불편한 아이도 소품에 참석했는데... 그래서 화를 냈겠지! 
그런데 그 아이의 가정 사정을 알았을까? 아마 지금도 그 교사가 살아있다면 그런 사정을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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